건어물 목사와 3대 예우<국민일보> (2017.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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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산재건교회 댓글 0건 조회 1,879회 작성일 20-09-17 20:51본문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 교회목회를 사임하고 마산으로 가셔서 건어물을 사서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다가 해방 후 재건파를 세우시고 외롭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지요…제가 해방 후 일본서 돌아와서 마산에 은거하던 강상은 목사의 사택을 찾아 갔을 때 기쁘게 나를 맞아주셨지요”,
국민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한국기독역사여행-신사참배 거부 조수옥 전도사’편을 읽은 원로신학자 이장식 목사가 5장 묶음 편지를 보내왔다. “이제는 얌전하게 글을 쓸 수도 없는 손가락이 되어서 이렇게 난필”이라고 적은 그는 기독교 역사학 권위자다. 망백을 훌쩍 넘겼다.
이 목사는 강상은 목사가 당시 호주선교회로부터 장학금을 얻어주어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1942년 10월 16일 한국교회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총회 총대 전원이 평양 신사에 가서 현인 신이라는 일본 왕에게 궁성요배했다. 이날 이어진 전승예배에서 총회 간사 최지화, 정인과가 헌납 교회종이 1540개라고 보고했다. 종을 녹여 총알 만드는데 쓰였다. 음행한 무리는 잡신 앞에 엎드려 성육신을 부인했다. 한국교회의 친일부역이 노골화된 날이었다.
앞서 1938년 9월 10일 총회에서는 성경을 부정하는 성명서가 채택된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를 기함”.
이같은 한국교회의 훼절은 당시 경남 진해 경화동교회 강 목사의 삶을 뒤흔들었다. 일경이 “경남노회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따라 달라”고 요구했고 강 목사는 단호히 거절했다. 많은 교인이 “총회가 국민의례로 의결한 사항을 굳이 우상숭배로 우겨야 할 필요 있느냐”며 강 목사를 압박했다. 그는 타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임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의 가정제단까지 문제 삼으며 그를 구속했다. 이미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최덕지 주남고 최상림 조수옥 등 전국적으로 수많은 성도가 신사참배를 거부, 검속된 상태였다. 주기철 최상림 목사 등은 옥중 순교했다.
강 목사는 옥중금식으로 뼈만 남은 상태에서 가석방됐다. 출옥후 건어물장사, 양봉, 농사로 자립 기반을 세우고 우상섬기기를 거부하는 교인들과 공동생활을 했다. 거제도에서 어장일을 하면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버지 김홍조 장로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다. 평양 부산 광주 대구형무소에서 수년씩 치안유지법이란 죄목으로 옥살이를 한 신사참배 거부 성도들이 출옥했다. 평양형무소에선 70여명 수감자 중 50여명이 순교했고 20여명만 출옥할 수 있었다. 최덕지는 “하나님의 정의는 살아 있고 진리는 끝내 승리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출옥 성도들은 철저히 친일부역자들이 장악한 교권에 의해 밀려났다. 출옥 성도들이 회개를 촉구했으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이라고 주장했다. “일제의 강제와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들의 노고도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는 군색한 변명을 해댔다. 사회의 친일청산 실패와 같이 교계의 부역자 청산도 실패했다. 부역자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라는 말의 수사로 반민특위 칼날도 피해갔다.
지난해 대통령 탄핵과 맞물린 최태민과 최순실의 사술에 놀아난 한국교회를 두고 평범한 교인들이 이렇게 얘기했다. “신사참배의 원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망하고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말이다.
독립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갔다온 성도조차 독립운동가 반열에 올리지 못한 한국교회다. 출옥 성도 “3대 예우”는커녕 자신들의 3대 세습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역사신학자의 편지 말미. “일제 말년 신앙박해를 받아가면서 살아온 신앙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은데 우리는 그것을 다 모르고 역사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
2017년 8월 19일(토) 국민일보 오피니언
-삶의 향기- “건어물 목사와 3대 예우” <전정희, 논설위원, 종교국선임기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 교회목회를 사임하고 마산으로 가셔서 건어물을 사서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다가 해방 후 재건파를 세우시고 외롭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지요…제가 해방 후 일본서 돌아와서 마산에 은거하던 강상은 목사의 사택을 찾아 갔을 때 기쁘게 나를 맞아주셨지요”,
국민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한국기독역사여행-신사참배 거부 조수옥 전도사’편을 읽은 원로신학자 이장식 목사가 5장 묶음 편지를 보내왔다. “이제는 얌전하게 글을 쓸 수도 없는 손가락이 되어서 이렇게 난필”이라고 적은 그는 기독교 역사학 권위자다. 망백을 훌쩍 넘겼다.
이 목사는 강상은 목사가 당시 호주선교회로부터 장학금을 얻어주어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1942년 10월 16일 한국교회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총회 총대 전원이 평양 신사에 가서 현인 신이라는 일본 왕에게 궁성요배했다. 이날 이어진 전승예배에서 총회 간사 최지화, 정인과가 헌납 교회종이 1540개라고 보고했다. 종을 녹여 총알 만드는데 쓰였다. 음행한 무리는 잡신 앞에 엎드려 성육신을 부인했다. 한국교회의 친일부역이 노골화된 날이었다.
앞서 1938년 9월 10일 총회에서는 성경을 부정하는 성명서가 채택된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를 기함”.
이같은 한국교회의 훼절은 당시 경남 진해 경화동교회 강 목사의 삶을 뒤흔들었다. 일경이 “경남노회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따라 달라”고 요구했고 강 목사는 단호히 거절했다. 많은 교인이 “총회가 국민의례로 의결한 사항을 굳이 우상숭배로 우겨야 할 필요 있느냐”며 강 목사를 압박했다. 그는 타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임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의 가정제단까지 문제 삼으며 그를 구속했다. 이미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최덕지 주남고 최상림 조수옥 등 전국적으로 수많은 성도가 신사참배를 거부, 검속된 상태였다. 주기철 최상림 목사 등은 옥중 순교했다.
강 목사는 옥중금식으로 뼈만 남은 상태에서 가석방됐다. 출옥후 건어물장사, 양봉, 농사로 자립 기반을 세우고 우상섬기기를 거부하는 교인들과 공동생활을 했다. 거제도에서 어장일을 하면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버지 김홍조 장로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다. 평양 부산 광주 대구형무소에서 수년씩 치안유지법이란 죄목으로 옥살이를 한 신사참배 거부 성도들이 출옥했다. 평양형무소에선 70여명 수감자 중 50여명이 순교했고 20여명만 출옥할 수 있었다. 최덕지는 “하나님의 정의는 살아 있고 진리는 끝내 승리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출옥 성도들은 철저히 친일부역자들이 장악한 교권에 의해 밀려났다. 출옥 성도들이 회개를 촉구했으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이라고 주장했다. “일제의 강제와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들의 노고도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는 군색한 변명을 해댔다. 사회의 친일청산 실패와 같이 교계의 부역자 청산도 실패했다. 부역자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라는 말의 수사로 반민특위 칼날도 피해갔다.
지난해 대통령 탄핵과 맞물린 최태민과 최순실의 사술에 놀아난 한국교회를 두고 평범한 교인들이 이렇게 얘기했다. “신사참배의 원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망하고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말이다.
독립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갔다온 성도조차 독립운동가 반열에 올리지 못한 한국교회다. 출옥 성도 “3대 예우”는커녕 자신들의 3대 세습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역사신학자의 편지 말미. “일제 말년 신앙박해를 받아가면서 살아온 신앙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은데 우리는 그것을 다 모르고 역사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
2017년 8월 19일(토) 국민일보 오피니언
-삶의 향기- “건어물 목사와 3대 예우” <전정희, 논설위원, 종교국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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